한 유명한 야구선수의 고민 상담을 한 적이 있다. 

"슬럼프에 빠져 예전처럼 성적이 나오지 않아 힘들다. 잘할려고 하는데 계속 슬럼프에 빠진다. 그러다보니 연봉도 줄고 다른 사람의 대우도 줄었다. 예전에는 리무진을 타고 다녔는데 요즘에는 버스를 타고 다닌다. 불행하다. 은퇴를 할 생각이다." 

그래서 나는(법률스님) 그 야구선수에게 물었다. 

"당신이 어렸을 때 야구를 할 때, 돈을 벌기 위해서 야구를 했습니까?" 
"아니요.." 
"당신이 처음으로 프로입단을 했을 때 어땠습니까?" 
"아주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 당시는 지금보다 연봉도 적게 받았을 터이고, 인지도도 없었는데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연봉도 그때보다 많이 받고 인지도도 많아졌는데 불행해졌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문명이 탄생한 지 몇천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 모른다. 
자기 밖에 있는 여러가지 과학지식은 많이 터득했음에도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여전히 모른다. 
우리의 마음을 탐구해 나가야 한다. 

수행자의 핵심은 '탐구'다. 
종교 경전을 열심히 외우는 것이 아니다. 
과학은 물질을 탐구할 뿐이며, 
불교는 마음을 탐구할 뿐이다. 




일본 지진 사태에 대해 '벌받았다' 라고 말하는 종교인들이 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안되니 '벌받았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종교가 아니다. 

자연과 윤리는 상관이 없다. 
옛 사람들은 천둥이 치면 우리가 부도덕하여 하늘이 노했다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천둥치는 것과 윤리는 상관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 지금 종교는 마찬가지 말을 하고 있다. 

윤리는 윤리 나름대로 지켜져야 할 것이고 자연은 그 나름대로 탐구되어야 할 것이지, 그것을 결부시켜서 인과응보 식으로 설명해선 안된다. 


앎과 모름을 구별해야 한다. 
우리가 아는 것은 무엇이고 모르는 것은 무엇인지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모르는데도 아는 것처럼 해선 안된다. 




혼자 있어서 외롭다고 한다. 
하지만 이성친구를 사귀거나 결혼을 하면 나름의 고통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혼자 있는 것은 혼자 나름대로 좋은 점이 있고 둘이 있으면 둘이 잇는 나름의 좋은 점이 있다. 


사람의 만족도와 선호도는 다르다. 
선호도는 다른 사람들이 정해놓은 규칙이다. 
이것은 명예, 권력, 돈 등 '갖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만족도는 그 선호도와 다르다. 
만족은 자기 자신에게서 찾아야 한다. 




나이트 클럽이라 하자. 
무대 위에서는 백댄서가 춤을 추고 있고, 
무대 아래에서는 손님들이 춤을 추고 있다. 
모두가 춤을 추는데 백댄서는 돈을 받고 춤을 추고 손님들은 돈을 주고 춤을 춘다. 
춤이 끝날 시간이 되었는데 시간이 30분 연장 되었다고 하자. 
어떻게 되었겠는가? 
백댄서는 대가를 안받고 더 하게 되니 불평할 것이다. 
반면 손님들은 돈을 안내고도 춤을 출 수 있으니 행복할 것이다. 

우리는 노동을 통해서 돈을 벌고 놀이를 통해서 돈을 쓴다. 
돈을 벌려는 순간 노동이 되고, 돈을 쓰려고 하는 순간 놀이가 된 것이다. 
똑같은 일이라도 돈을 받으려고 하면 더 불행해지는 것이다. 



여기 바다가 있다. 
이 바다를 보고 너무 아름답다고 하자. 
그러면 바다가 기분 좋아하는가? 
아니다. 우리 자신의 마음이 아름다워진다. 
이 바다의 색깔이 더럽다고 욕을 했다 하자. 
그러면 바다가 기분 나빠하는가? 
아니다. 우리가 기분이 나빠진다. 

사람 사이에서도 그렇다. 
대상을 좋아하면 내가 좋고 
대상을 싫어하면 내가 싫다. 

사람들은 종종 다른 사람이 나를 이해해주지 않는다고 불평한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이 다른 사람을 이해해주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이해받으려 하지 말고 이해하라. 
베품을 주려고 하지 말고 베풀어라. 
사랑을 받으려고 하지 말고 사랑하라. 

주인이 된 자세다. 
나부터 바뀌는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은 희생이 아니다. 
진리를 향하는 길에는 희생이 없다. 
give & take가 아니다. 
보상을 받는다는 것은 희생에 대해 대가를 치르는 것이다. 
그 자체로 즐겁다면 그것은 희생이 아니며, 보상을 억지로 받을 필요도 없다. 

위대한 선지자들은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려고 하는데, 억지로 희생하라고 할 이유가 없을까?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 자체가 본인의 마음을 평화롭고 행복하게 해주기 때문에 사랑하라고 한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이 보람을 느낀다면 가치가 없다. 





사랑을 받으려 하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다. 
사랑은 물건이 아니다. 매매할 수 없다. 

요즘 결혼할 때 상대방의 학벌, 집안, 권력 등등을 본다. 
그것은 결혼을 give & take로 보는 것이다. 
주고 받음으로 보는 것인데, 그것은 욕망의 결집체인 것이다. 
그것은 사랑으로 포장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났을 때 
"내가 이렇게 잘 대해줬는데 떠날 수 있어?" 하고 원망한다. 
그것은 자신이 사랑한 만큼 보상받으려 하는 것이다. 
사랑은 내가 기쁘기에 하는 것이다. 그 사람에게 사랑으로써 보상받으려 한 것이 아니다. 





이전에는 세상에 영원한 것은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은 변한다. 
영원한 것은 없다. 

또 이전에는 이 세상에 '단독으로 존재하는 결정체(아트만)'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원자도 그래서 '아톰'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하지만 원자 내에는 전자, 중성자, 양성자 등이 있고 그들은 쿼크로 이루어져 있으며 쿼크는 또다시 다른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 
이 세상에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당신이 과학자라 하자. 
여태까지 했던 것과 다른 실험결과가 나왔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라? 여태까지 했던 것과 다르니까 실패네.." 할 것인가? 
아니다. 호기심있게 그 현상을 바라보고 그럼으로써 더 많이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삶에서 이런 현상이 오면 실패로 인식하고 자책한다. 

실패는 없다. 
"어라? 안되네" 하고 느끼는, 연습만이 존재할 뿐이다. 


반론을 환영하라. 
반론을 받음으로써 자신이 가질 수 있는 맹점을 알 수 있다. 
그러면서 더 나아갈 수 있다. 




내가 가기 싫은 강연이 있다. 
첫째는 방송강연이다. 
거기 방청객은 돈을 받고 들으러 온 사람들이다. 
겉으로는 강연을 듣는척 하면서 필기를 하는 척 하지만 
실제로는 고통스럽게 그 순간을 버티고 있다. 

둘째는 대학교 강연이다. 
대학교 강연 중에서도 들으면 학점준다는 강연이다. 
여기도 보아하니 분위기가 그러한데, 난 그런 강연은 미리 알게 되면 절대 가지 않는다. 300명이 앉아 있더라도 듣는 사람들은 억지로 듣는다. 

셋째는 회사 강연이다. 
회사원들은 회사에서 억지로 아침에 강의를 시키는 것을 들어야 한다. 마치 초등학교 때 숙제를 해가야 하는 것처럼 깨달음을 얻는 과정도 강제로 시킨 것이다. 



이런 강연의 공통점은 소통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들으려고 온 것이 아니라 어떤 대가를 위해서, 또는 어떤 압력 때문에 억지로 온 것이다. 




명상 안해도 된다. 
기도 안해도 된다. 
그래도 행복할 수 있다. 
우리의 마음을 탐구해보면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안다. 
하지만 이전에 너무나도 다른 쪽으로 사용된 '습관' 때문에 우리가 불행해져서 기도, 명상, 종교 등에 의지하는 것이다. 
그 습관을 고치고 우리가 행복해지려 마음을 연습하는 것이 바로 '수행'이다. 
불교에서는 '업(karma)'라는 말이 있는데 바로 이 '업'이 '습관'이다. 



- 법륜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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