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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7.07 신숙주와 세조의 일화. 2

김종서, 황보인, 안평대군 등 자기 야망의 구현에 방해가 되는 대신들과 형제까지 살해한 다음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세조는 불의하게 찬탈한왕권을 지키기 위해
성삼문, 하위지 등 사육신을 몰살시킨 데다, 귀양 가 있는 단종까지 뜨거운 군불로 데워죽이는 등 험악하고 잔인한 짓을 많이 했으나, 군주다운 도량은 있어서 신숙주, 한명회 등 유능한 대신들의 보필에 힘입어 대체로 부국애민의 올바른 정치를 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자기가 한 일이 있는 만큼 남을 믿지 못하여, 누가 불충한 뜻을 품고 역모를 꾸미지 않나 하고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유머로 대신들을 즐겁게 하고, 파격적인 예우로써 꼼짝못하게 수완을 발휘하는 면도 있었다.

어느 날 저녁, 세조는 편전에 앉아 글을 읽다 말고 갑자기 대신들을 입궐시키라는 분부를 내렸다. 전갈을 받은 대신들이 무슨 영문인지 모른 채 허겁지겁 달려오자, 사옹원에 미리 지시하여 준비해 두었던 향기로운 술과 기름진 안주를 내오게 했다.

"경들을 급히 부른 까닭은 다름이 아니라, 봄기운에 하도 마음이 산란하고 심심하기도 하여 술이나 한 잔 하자는 것이오. 그러나 전쟁할 때 군령이 있는 것 처럼 술을 마실 때는 주령이 있어야 겠으니, 과인이 부르면 당사자는 즉시 대답을 해야 하오. 특히 이것은 좌상과 우상한테 해당되는 영이니, 명심하시오."

좌의정은 신숙주였고, 우의정은 이조판서에서 갓 승진한 구치관이었다.
대신들은 왕이 또 무슨 장난을 치려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만약 한 분이라도 대답이 틀릴 경우 똑같이 죄를 물어서 큰 잔으로 벌주를 내릴 터이니, 두 분은 주의해야 할 거요."

그렇게 선언한 다음 왕은 '신정승' 하고 불렀다.
신숙주가 '예이' 하고 대답하자, 세조는 껄껄 웃었다.

"과인이 부른 것은 그대가 아니라 신임 정승이라오. 신임 정승을 불렀는데 좌상이 대답했고, 정작 대답해야 할 우상은 대답을 하지 않았으니, 두 분 정승은 벌주를 마셔야겠소."

대접에 철철 넘치게 술을 부어 신숙주, 구치관 두 사람으로 하여금 마시게 한 세조는 이번에는 '구정승' 하고 불렀다. 구치관이 '예이' 하고 대답하자,

"이번에는 옛 구(舊)자' 즉 먼저 정승된 사람을 부른 것인데 당사자인 좌상은 입을 다물고 있고 우상이 대답을 했으니 역시 벌주를 마셔야겠군."
하며, 또 술을 따라 주었다.

그러고 나서 또 '신정승' 하니, 두 대신이 동시에 대답했다.
"한 사람을 부른 것인데 두 사람이 같이 대답을 하였으니, 역시 주령을 어긴 것이오."
역시 벌주를 내린 세조는 또 '구정승' 하고 불렀다.
이번에는 누가 대답해야 할지를 몰라 두 사람은 똑같이 입을 다물고 있었다.

"성을 불렀든 정승 임명의 차례로 불렀든 간에 임금이 부르는데 대답하지 않으니, 이런 무례 막심한 일이 있나."

이번에도 두 사람은 어김없이 벌주를 마셔야 했다.
그러다 보니 신숙주와 구치관은 얼마 안 가서 대취해 버렸다. 그 모양을 본 세조는 기분이 좋아서 껄껄 웃었고, 다른 대신들도 덩달아 흥겨워했다.

"경들 가운데 어느 한 쪽이 성을 갈지 않고는 견디지 못할 것이오. 내가 딴 성을 정해줄 터이니, 어느 분이 성을 갈겠소?"
세조로부터 그처럼 조롱을 당하자, 신숙주가 혀 꼬부라진 소리로 말했다.

"전하께서 내신 문제는 저희가 아무리 재주와 지혜를 짜내더라도 도저히 당할 수 없으니 항복하겠습니다. 그러나 전하의 장기인 팔씨름이라면 신에게도 어느 정도의 승산이 있으므로 황송하오나 허락해 주시면 감히 겨루어 보고, 패하는 경우 깨끗이 승복하겠습니다.

그 말을 듣자, 세조의 입이 벌어졌다. 팔씨름은 그가 자랑하는 특기였기 때문이다.

"경은 젖먹던 힘까지 내더라도 과인을 못 당할걸. 글읽기라면 또 모르되, 경같은 골생원이 팔씨름에서 과인을 당할 수 있을 것 같은가."

"황공합니다. 그러나 길고 짧은 것은 대보아야 알지 않겠습니까."

"그럼 어디 겨루어 보오."

그렇게 해서 삼판 양승제로 왕과 신하가 오른팔 소매를 걷어붙이고 다가앉아 팔씨름에 들어갔는데, 팔 힘이 센 세조가 두 판을 연거푸 간단히 이겨버렸다.

"그런 허약한 팔을 가지고 어찌 과인을 당할 수 있나. 스스로 원한 일인 만큼, 약속대로 경은 이제 성을 갈아야겠지?"

"황공합니다. 신에게 비술이 있어서 상대가 항우라도 능히 이길 수 있으나, 신하로서 차마 불경한 짓을 할 수 없어 일부러 진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세조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패장은 할 말이 없는 법인데, 경은 두 번을 지고도 승복하지 않고 큰 소리를 치니 용서할 수 없군. 정 그렇다면 다시 한 번 기회를 주겠는데, 이번에는 팔목이 부러져도 할말이 없겠지?"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되어 세 판째의 팔씨름이 벌어졌다.
그런데 어찌된 셈인지 이번에는 신숙주가 몸의 자세를 이상하게 비틀며 손목에 힘을 가하자 맞잡은 두 손목이 신숙주 쪽으로 쑥 기울어졌다. 그와 동시에 세조의 얼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지며 비명같은 소리가 튀어나왔다.

"아야, 아야! 아파서 못 견디겠으니 팔을 놔. 과인이 졌어."

그 광경을 본 모든 대신들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하는 가운데, 나중에 왕위에 올라 예종이 된 세자가 붉으락푸르락한 표정으로 신숙주를 흘겨보니, 구치관이 얼른 신숙주의 옆구리를 찔러 만류했다.

취한 가운데서도 눈치빠르게 알아들은 신숙주는 슬며시 왕의 손을 놓고,
"황공합니다. 이번에는 신의 운이 좋았을 따름입니다. 전하께서 먼저 두 판을 제압하셨으므로 승패는 이미 판가름났으니, 원하건데 팔씨름은 비긴 것으로 해서 신의 성을 가는 벌칙은 면하도록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하고 짐짓 혀 꼬부라진 소리로 말한 다음 비틀거리면서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렇지만 자존심을 꺾인 세조의 표정이 밝을 수가 없었고, 그러다보니 자연히 흥이 깨진 연회는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모두들 집으로 돌아갈 때, 한명회가 신숙주의 청지기를 가만히 불렀다.

"자네 대감께서 오늘 너무 술이 과하셨구나. 대감은 평소에 아무리 취해서 주무시다가도 이른 새벽에 일어나 글을 읽는 습관이 있는 줄로 아는데, 요즈음도 그러시겠지?"

그렇다고 청지기가 대답하자, 한명회는 신신당부를 했다.
"그렇더라도 오늘밤에 또 그 습관대로 했다가는 큰일이다. 대감께서 귀가하여 잠자리에 드시거든 자네가 지키고 있다가 방 안의 촛대를 모두 치워 감추어라. 비록 잠이 깨더라도 불을 못 켜시게 말이다. 내 말 명심해서 시행하지 않았다가는 대감께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이니, 그 때는 자네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줄 알라."

과연 그날 밤 삼경 쯤 되어 신숙주는 잠이 깨었다. 그래서 평소의 습관대로 책을 읽기 위해 불을 켜려 했으나, 아무리 더듬어도 부시와 촛대를 찾을 수 없었다. 옆방에 자는 청지기를 깨우려 했으나, 그 또한 술을 마셨는지 곯아 떨어져서 꿈쩍도 하지 않으므로, 할 수 없이 도로 잠자리에 들어 아침까지 늘어지게 자버렸다.
한편 세조는 연회가 끝나고 나서도 불쾌한 기분을 달랠 수가 없었다. 성격이 날카로운 데다 숱한 피를 보고 나서 왕권을 탈취한 자격지심으로 의심이 많은 그는 신숙주의 행동을 예사로 생각할 수가 없었다.

'제깐놈이 역모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를 업신여기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술기운을 핑계로 평소의 마각을 드러낸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어찌 그런 창피를 줄 수 있나.'

그렇게 생각한 세조는 내관 하나를 가만히 불러 엄명을 내렸다.
"너 오늘 밤 좌상 댁에 가서 담 너머로 몰래 좌상대감의 침방에 밤 사이 불이 켜지는지 쭉 살펴보고 오너라. 어김이 있어서는 안 되느니라."

명령을 받은 내시는 밤을 꼬박 새우며 신숙주의 집 동태를 살피고는 날이 밝자 돌아왔다. 그러고는 자기가 줄곧 감시했지만, 신숙주의 방에 불이 켜지지 않았다고 보고했다.
그제서야 세조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면 그렇지. 내가 저한테 베푼 은공이 어떠한데 감히 딴 마음을 품으랴. 그러고보니 그 사람이 어제 벌주에 어지간히도 취했던가 보구나.'

세조의 일등공신 신숙주도 한명회의 순발력있는 지혜를 도움받지 못했더라면 하루 아침에 불행한 꼴을 당하고 말았을 것이 틀림없다. 무릇 신하된 사람은 왕의 신임이 두터우면 두터울수록 오뉴월에 숯불 지핀 화로를 이불 속에 넣고 자듯이,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Posted by Lucid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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